Book · 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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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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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본체만체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무론이어니와 가장 다정한 듯이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말소리로 가까이 오는 자도 기
실은 나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그러함이 아니라 나를 속이고 나를 농락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 함이었다.
영채는 지금 자기가 일생에 잊히지 아니하고 생각하고 그리던 형식을 만났으니 지금까지 가슴속에 간직하였던 회포를 말하리
라 하였다. 세상에 아직도 제 회포를 들어줄 사람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영채는 더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그러나 영채
는 다시 생각하였다. 형식의 얼굴빛을 보매, 자기를 만난 것을 반가워하는 것과 자기의 신세를 불쌍히 여기는 줄은 알건
마는 만일 자기가 몸을 팔아 기생이 되어 오륙 년간 부랑한 남자의 노리개 된 줄을 알면 형식이가 얼마나 낙심하고 슬퍼
하랴. 또 형식은 아주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라는데 만일 내가 기생 같은 천한 몸이 되었다 하면 싫은 마음이 아니 생길
까. 지금은 형식이가 저렇게 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나를 대하여 사랑하는 빛을 보이건마는 내가 만일 기생이 되었다
는 말을 하면 곧 미운 생각이 나고 불쾌한 생각이 나지나 아니할까. 그래서 '너는 더러운 사람이로다. 나와 가까이할
사람이 아니로다' 하고 얼굴을 찡그리지 아니할까. 이러한 생각을 하매, 영채는 더 말할 용기가 없어졌다. 지금까지 죽
은 부모와 동생을 만나 보듯 한 반가운 정이 스러지고 새로운 설움과 새로운 부끄러움이 생긴다. 아아, 역시 남이로구나
. 형식이도 역시 남이로구나. 마음놓고 제 속에 있는 비밀을 다 말하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영채는 새로이 눈물이 흘러
고개를 숙였다. 내가 왜 기생이 되었던고, 왜 남의 종이 되지 아니하고 기생이 되었던고. 남의 종이 되거나, 아이
보는 계집이 되거나, 바느질품을 팔고 있었더면 형식을 대하여 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고 이렇게 제 속에 있는 말을
못 하지는 아니하려든. 아아, 왜 내가 기생이 되었던고. 무론 영채는 제가 기생이 되고 싶어 된 것은 아니었다. 아
버지와 두 오라비를 건져 내려고 기생이 된 것이라. 영채가 평양 감옥에 다다라 처음 그 아버지와 면회를 허함이 되었던
날. 영채는 그 아버지를 보고 일변 놀라고 일변 슬펐다. 철없고 어린 생각에도 그 아버지의 변한 모양을 보매 가슴이
찌르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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