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o · 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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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r: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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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생같이 고결한 어른의 따님이, 그렇게 꽃송아리같이 어여쁘던 영채가 설마 그렇게 몸을 더럽혔을 리가 있으랴. 정녕시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면서도 송죽의 절개를 지켜 왔으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 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어 왔는고.
영채는 다시 말을 이어, 그 악한에게 잡혀가는 일에서부터 지금까지 지내 오던 바를 말한다.
영채는 마침내 그 악한에게 붙들려 갔다. 그 악한의 집은 산밑에 있는 조고마한 집안이었다. 얼른 보아도 게으른 사람의
집인 줄을 알겠더라. 그 악한은, 지금은 비록 이러한 못된 짓을 하거니와, 일찍은 이 동네에서 부자라는 이름을 듣고
살았었다. 그러나 원래 문벌이 낮아 남의 천대를 받더니, 갑진년에 동학의 세력이 창궐하여 무식한 농사꾼들도 머리를
깎고 탕건을 쓰면 호랑같이 무섭던 원님도 감히 건드리지를 못하였다. 이 악한도 그 세력이 부러워 곧 동학에 입도하고,
여간 전래의 논밭을 다 팔아 동학에 바치고 그만 의식이 말유한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감사도 되고 군수
목사도 되리라는 희망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이제는 논밭 한 이랑도 없는 거지가 되고 말았다. 마음이 착하고 수양이
많은 사람이면 아무리 가난하여도 절행을 고칠 리가 없건마는, 원래 갑작 양반이나 되기를 바라고 동학에 들었던 인물이라
, 처음에는 양반의 체면과 신사의 체면도 보았건마는 점점 체면을 차리는 데 필요한 두루마기와 탕건과 가죽신이 없어지매
양반의 체면과 신사의 체면도 그와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그 악한은 아무러한 짓을 하여서라도 돈만 얻으면 그만이요,
술만 먹으면 그만이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동네에 유명한 협잡꾼이 되고 몹쓸놈이 된 것이라. 객주에 앉아서
영채의 밥값을 담당함은 잠시 이전 신사의 체면을 보던 마음이 일어남이요, 영채가 계집아이인 줄을 알며 그를 업어 감
은 시방 그의 썩어진 마음을 표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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