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ek · 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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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eur: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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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영채는 아버지의 책망이 두려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서 그때 열세 살 된 형식에게 몰래 청하였다. 그때에는 아
직 형식과 영채가 말을 하지 아니하던 때라, 영채는 부끄러운 듯이 반쯤 외면하고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저, 언문 써주셔요" 하였다. 이 말을 할 때의 영채의 얼굴과 태도는 형식의 눈에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참
어여쁜 계집애로다' 하고 형식도 부끄러운 생각이 나면서, "녜, 내일 아침에 써드리지요" 하고 오 리(五里)나 되는
종이 장사 집에 몸소 가서 장지를 사다가―이 종이가 그 종이다― 있는 정성을 다 들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넉 장이나
써버리고야 이것을 썼다. 그것을 써서 책 사이에 끼워 두고 '어서 아침이 왔으면'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저
, 언문 써주셔요' 하고 모로 서서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 영채의 모양이 열세 살 되었던 형식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박혔
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형식은 더욱 양치와 세수를 잘하고 두루마기를 방정히 입고 그 종이―이 종이로다―를 접어 품에
품고 대문에 서서 영채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생각은 마치 사랑을 하는 남자가 사람 없는 곳에서 그 사랑하는 처녀를 기
다리는 생각과 같았다. 이윽고 영채도 누가 보기를 꺼리는 듯이 사방을 돌아보며 가만가만 나오다가 형식의 곁에 와서는
너무 기쁜 듯이 얼굴이 빨개지며 형식의 허리를 꼭 쓸어안았다. 형식은 자기의 가슴에 치는 영채의 머리를 살작 만졌다.
지금 세수를 하였는지 머리에는 물이 묻었더라. 그러고는 품속에서 그 종이―이 종이로다―를 내어 영채에게 주었다. 그
종이는 형식의 가슴의 체온(體溫)으로 따뜻하더라. 영채도 그 종이의 따뜻함을 깨달았는지 한 걸음 물러서서 가만히 형
식의 눈을 보더니 낯이 빨개지며 뛰어들어갔다. '이것이 그 종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고개를 들어 다시금 그 종이와
글자를 보았다. 그 글자가 제가끔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안주에서 지내던 일과, 자기의 그 후에 지내던 일과, 영
채의 이야기와 편지와 자기의 상상과로 본 영채의 일생이 번개 모양으로 형식의 머리로 지나간다. 형식은 한번 더 입술을
물며―이것은 불식부지간에 영채에게 배운 것―그 종이를 끝까지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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